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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山大捷, 荒山戰鬪 |
황산대첩, 황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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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 |||
날짜 | |||
1380년 9월 | |||
장소 | |||
전라북도 남원 | |||
교전세력1 | 교전세력2 | ||
교전국 | 고려(高麗) | 왜구(倭寇) | |
지휘관 | 이성계 변안열 우인열 도길부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 왕복명 이지란 처명 | 아기발도 † | |
병력 | 불명 | 불명 | |
피해 규모 | 불명 | 70여명 외 전멸 | |
결과 | |||
왜구의 괴멸 | |||
기타 | |||
대 왜구 전쟁에서 고려가 거둔 최대의 군사적 성공 |
1 개요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에 미래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전투. 순서상으로 보면 진포대첩(鎭浦大捷)과 사근내역(沙近乃驛) 전투에 이어서 연달아 벌어진 1380년의 대 왜구 전쟁의 종결판이다. 이 전투들은 별개의 전투이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 한 항목에서 합쳐서 서술한다.
진포전투와 황산전투를 비롯한 이 1380년의 전쟁은 고려 말기를 징그러울 정도로 뒤흔들었던 왜구와의 치열한 사투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전투라고 할 수 있는데, 황산전투에 참여했던 왜구는 진포에 상륙했던 왜구 이외에도 고려의 내륙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왜구가 집결한 연합세력이었다.
이렇게 끌어모은 군단이 괴멸됨에 따라 왜구는 그 활동 양상에 급격한 변화를 보였으며, 작게는 침입 대상지역이 한반도의 서부지역에서 동부지역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크게는 그 침입의 규모나 횟수도 현저하게 감소되기에 이르렀다.[1]
2 배경
2.1 고려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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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
이후 시간이 흘러 세계 전역에 번진 몽골의 불꽃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고려에는 공민왕이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국가의 부흥을 꿈꾸며 여러 조치를 취했고, 제1차 요동정벌을 시도하여 약 445년만에 요동성을(잠시나마) 장악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시아는 가히 몽골제국 체제가 붕괴하며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이 모두 세기말적 현상을 보이던 난세였다. 중국에서는 홍건적(紅巾賊)을 비롯한 반란군이 천지를 가득채울 정도로 들끓었으며 그 기세는 고려에까지 번져, 왕이 홍건적의 대군에 쫓겨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던 초유의 사건이 전개되었으며 원나라 군벌들이나 기황후 일파의 사주를 받은 병력이 고려 국경을 수시로 공격하는 사건등이 있었다.
이렇게 북방으로부터의 압력도 버티기 어려웠던 고려에게 있어 또다른 불운은, 일본에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생긴 혼란으로 인하여 무수한 왜구가 발생, 고려의 해안가를 유린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왜구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은 한국의 학자들과 일본의 학자들, 그리고 거기서도 또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민족주의가 섞인 정치성 목적까지 들어가 주장하는게 다른 민감한 주제라 뭐라고 이거다! 하고 단정하기는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왜구의 갑작스런 증가에 대한 국내의 일반론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며 일본이 갈라져 전란이 지속되는 통에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2차례에 걸쳐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정벌한 바 있는 규슈와 그 주변의 쓰시마 등 섬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가장 곤궁하여,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을 노략질한 해적 무리는 거의 이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려에서는 권력층 사이에서 치열한 정권 다툼이 계속되고 농장이 발달하는 등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관련하여 국방이 허술해졌으며 중국도 원 왕조 말기의 내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도 왜구가 창궐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왜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때 당시의 왜구들은 전기왜구(前期倭寇)로 불리운다.[3]
2.2 왜구의 득세
본래 고려와 왜구는 별다른 접점이 있지 않았다. 고려 시기에 처음으로 왜구가 침법한 시기는 고종(高宗) 10년인 1223년으로, 이후 5년간 왜구가 몇 차례 침입했지만 이후 백여년간 왜구의 침입은 단 10차례도 넘지 못하여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어디까지나 가끔 와서 털어먹는 하잘 것 없는 해적 놈들 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같은 사건도 있었으니 오히려 이쪽에서 일본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1350년 무렵을 기점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서, 더 이상 왜구는 가끔 가다 와서 털어먹는 별거 없는 해적 놈들이 아닌, 고려라는 국가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엄청난 위험세력 으로 변신했다.
이 시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한미한 정도라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공민왕의 재위기간 23년 동안, 왜구는 115번을 침공해 왔다. 그렇다면 공민왕과 바로 이어지는 우왕의 시기에는? 14년동안 278번을 공격해왔다. 연평균으로 따지자면 공민왕 시기에는 왜구가 대략 한 해에 5번은 쳐들어왔고 우왕의 시기에는 한 해 동안 대략 18~20번을 공격해온 것이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그냥 썰물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이라고 해도 일년에 20여번을 당할 정도면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도적때 집단이니 뭐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더 강도가 강하여, 심지어 왜구 토벌에 나선 관군이 개발살 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아니, 차라리 교전을 해서 패배한 경우라면 몰라도, 왜구를 본 고려군이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는 막장스러운 사태도 자주 발생했다.
우왕의 시기에 접어들면 왜구의 기세는 앞서 말한대로 마른 장작에 붙는 불꽃 마냥 미친듯이 번져 나가 그럴만도 하겠지만, 이러한 사태는 이제 막 왜구의 준동이 시작되는 1350년대 초반에도 극심했다. 이미 1352년에도 내부소윤(內府少尹) 김휘남(金暉南) 등은 왜구의 함선을 보자 싸우지도 않고 달아는가 하면[4], 지익주사(知益州事) 김휘(金輝) 등이 왜구를 막으려고 싸워봤지만 이기지 못하고 되려 패배하는 사태 등이 발생했다. 왜구 준동의 초창기에도 이런 상황이었으니 본격적으로 가속도가 붙은 중반 이후에는 그야말로 망했어요……
더욱 곤란한 문제는 왜구의 이런 침입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육지의 적이었다면 어느 방어점을 설정하여 적을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군이었던 왜구는 가히 신출귀몰했고, 사실상 한반도의 전역이 왜구의 공격 루트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때 왜구의 침입을 가장 잘 받았을 만한 곳이 어디일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가장 일본과 가까운 경상남도 등의 목표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남해 연안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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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1년(1372) 이후 水軍체계의 재검토 中 ─ 이강욱, 군사지 제 82호 |
왜구가 막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1351년 무렵부터 이미 남해안에 들어와 내륙 깊숙히 진입해 활개를 치며 고성 - 죽림 - 거제 순으로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한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과 한달 뒤 선박 백여척을 이끌고 순천부로 침입했고, 섬진강을 따라 구례, 남원까지 침투하여 신나게 약탈한 뒤 다시 해로를 따라 장흥, 영광 등지를 휘저어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에 오른 우왕 시기도 아니었고 막 왜구의 공습이 시작되던 충정왕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서조차 왜구가 대놓고 해안가도 아닌 내륙 깊숙히 활보하며 관리를 때려 죽이는 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는 판이었다.
이렇게 남해안을 제 안마당처럼 활보한 왜구는 이제 서쪽 바다를 통해 점점 북상하게 된다. 그래도 1367년부터 1371년까지는 비교적 왜구의 활동이 잠잠해진 시기라 문제가 아주 심각하진 않아 '평온하다' 라고 할 수 있었지만[5] 1372년 즈음부터 해서 다시 미친듯이 쳐들어오게 되자 강화도 등이 직접적으로 왜구의 공격에 노출되는 상태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지만 경상도나 전라도도 아니고 강화도다. 인천 앞바다에 왜구가 출몰하고 수원이나 서울 부근에서 얼쩡거린다면 좀 실감이 나지 않겠는가? 심지어 국왕이 수원을 가는데 신하들이 왜구가 나온다고 말리는 판이었다. 어디 삼남지방 가는것도 아니다. 수원을 가는데 왜구 때문에 못 가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태를 좌시할 순 없었다. 아예 수도인 개경이 적에게 노출될 지경이었기에 고려군도 왜구를 무찌르려는 시도는 했다. 그게 안되서 그렇지. 왜군이 영덕(盈德)·덕원(德原)으로 쳐들어오자 고려군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기도 했으며 양천(陽川)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고려군이 패배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속수무책인 상황에는 왜구의 강력함과 고려의 막장스런 상황이라는 배경 조건도 물론 있었으나, 고려군의 형편없는 시스템도 한 몫을 했다. 한 예로 비상시 출동이 필요할때 임명되는 병마사(兵馬使)들을 전문적인 경험이 필요한 수군에 배치하여, 육지에서 근무하던 지휘관이 이끄는 수군이 왜구에게 계책으로 포위되어 지휘관들이 살해당하고, 그 모습을 보고 멘붕한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숫자가 10명에 8,9명이 되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6]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로 조운(漕運) 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일이다. 지방의 세미(稅米)를 옮기는데 있어 수로를 통한 운반만큼 효율적인 것도 드문데, 이러한 조운 선박들이 출발하는 남부 지역부터 도착할 서해 앞바다까지 모조리 왜구가 깔려 있으니 세미가 도착할 수가 있나……대몽항쟁 시기에도 어찌어찌 세미는 걷어들였던 고려였지만 이 시기는 도저히 답이 없었다.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세미를 실은 배가 왕래하지 못하여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백(伯)으로 봉한 모든 사람들 중에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이에게는 재ㆍ추의 녹과(祿科)를 주고 그 나머지 백에게는 이성 제군(異性諸君)의 예로 주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고려사절요 1358년 4월
심지어 지방의 세미가 오지 못해 조정에서 백관들에게 녹봉도 제대로 나눠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정치고 뭐고 일단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반 백성도 아닌 조정의 백관들의 녹봉도 받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이건 뭐…… 그런 와중에도 일부 땡중들은 자기들은 먹고 살자고 쌀 좀 주라고 하는등(……)의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7]
주원장(朱元璋) |
이 당시 고려가 받는 왜구의 피해가 어찌나 심각했던지, 심지어 고려의 사신 성준득(成准得)을 만난 명나라의 주원장 마저 고려가 왜구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다는 말을 듣고 일장 훈계(……)를 하기도 했다. 물론 명나라도 왜구에 만만찮게 곤혹을 겪기야 했지만…… 이 당시 성준득이 한 말에 따르자면 당시 고려 백성 중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50리 ~ 350리는 떨어진 곳에서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왜구의 기세가 너무나 흉흉해 해안가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바뀐 것. 아예 일부 현들은 이렇게 이동하여 내륙지역의 다른 군현에 교군(僑郡) 하기도 했다.
3 나름대로 대처는 해 보지만……
3.1 일본에 사절을 보내는 고려
물론 고려 역시 이런 사태를 해결해보려고 노력을 하긴 했다. 우선 고려는 일본에 사절을 보내 왜구들 단속 좀 똑바로 하라고 부탁을 했고, 그것도 꽤 여러 번을 요청했다.
봄, 정월에 일본국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답례하였다.먼저 왕이 왜구가 침범함을 근심하여 김일(金逸)을 보내어 왜구를 금해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1368년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왜구를 금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길상이 일본에 도착하여 병들어 죽었다. ─ 고려사절요 1377년
전 대사성(大司成)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어 답례하고 또 왜구를 금지하기를 청하였다. ─ 고려사절요 1377년
그러나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일단 당시 일본부터가 혼란기라 제 집안 단속하기도 어려운 시점이었고, 중앙정부가 확고한 힘을 가지고 지방 세력들을 휘어잡는 것이 못 되었기에[8] 이런 부탁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다. 일본 쪽에서도 "왜구 그 녀석들은 도망친 녀석들이라 우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정도로 답변을 할 뿐이었으니……
3.2 수군을 정비하는 고려
을미일. 왕이 경포봉(經浦峰)에 올라 함선을 살펴본 후 용천사봉(龍泉寺峰)에 유숙했는데 호위태세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제조관(提調官)들을 장형에 처했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1372년 공민왕은 이례적으로 직접 행차하여 수군을 사열한 후 군기가 문란한 인물들을 처벌하고 왜구의 침범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요지의 일장 훈시를 하였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이전 기록들에게 왕이 직접 수군을 사열한 특별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고려 조정에서 수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분위기가 조성되는 와중에 우현보(禹玄寶)은 "왜구를 대적하려면 반드시 수군이 있어야 한다." 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다. 당연히 왜구를 물리치려면 수군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여 이런 주장이 무슨 뻔한 소리인지 싶기도 하지만, 그게 그렇지도 않았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수전에서는 발릴 것이 뻔한데 뭐하러 함선을 건조해서 백성들이나 귀찮게 하나 라는 의견들도 있었던것.[9]
또한 공민왕은 최영(崔瑩) 등에게 함선 건조를 명령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군 강화에 뜻을 보였는데, 문제는 너무 갑작스레 규모를 키우려 하다보니 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최영은 전함 2천적을 삽시간에 만들려고 했는데 화끈화끈 열매를 먹었나보다 이러다보니 생긴 어려움에 지친 백성들이 집을 버리고 달아나는 사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은 대 왜구 문제에 관심이 많던 정지 등의 대책을 받아들이면서 보완해 나갔다.
또 임시로 임명된 육전 지휘관이 수군을 이끌고 나가서 말아먹는 사태를 보완하기 위하여 해도원수(海道元帥) 등의 직책이 등장했다. 이후에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와 같은 직위가 등장하며 공민왕 초기에 포왜사(捕倭使)가 임시직이거나 주현군에 속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 되어 수군은 육군의 편제에서 벗어난 수군자체의 지휘체계가 성립되게 된다.
공민왕 21년(1372) 이후 水軍체계의 재검토 中 ─ 이강욱, 군사지 제 82호 |
이렇게 정비된 수군은 교동과 강화를 기반으로 삼았는데, 1380년에 이르면 전라도 수군 중 정예한 자를 끌어모아 교동, 강화에 살게 하기까지 하였다.[10] 이후 고려수군은 양광도,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 앞바다까지 움직이며 왜구에 대항하게 된다.
4 헬게이트 고려
하지만 대책을 만들고 있다해서 지금 당장 몰려오고 있는 왜구들이 오지 않는것은 아니었다. 이제 1373년 무렵이 되면 왜구는 한양부(漢陽府)까지 쳐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이에 수백 리의 지방이 그 충격에 진동할 지경이었다. 강화도 근처는 이제 완전히 왜구의 뱃놀이터가 되어 수도 없이 왜구가 쳐들어오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벌벌 떠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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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 이후의 왜구>와 마쓰라토(松浦黨) 中 ─ 이영 |
왜구의 준동이 절정으로 치닿기 시작한 1370년대 후반부의 왜구가 침공해온 횟수, 공격한 지역, 그리고 쳐들어온 집단의 숫자다. 이 정도면 충격과 공포 라는 표현도 부족한 지경. 가히 동네 옆집에 놀러오듯 오는 수준이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보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원수를 보내주십시오."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바다를 뒤덮는 왜구로 시작된 이 3월의 공격은 경상남도 전지역을 유린하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었으며, 심지어 지리산 아래 까지 진군하였다.[12]이 싸움은 북방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후 6년만에 현장지휘관으로 복귀한 이성계가 이틀 길을 하루에 돌파하며 미친듯이 달려오고, 험지로 들어간 적을 부하들의 만류도 무시하고 다짜고짜 탱크처럼 밀고가 적을 멘붕 시키는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간신히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문제다. 사실 경상도가 이렇게 털리는 와중에, 이미 강화도 부근에서는 또다른 왜구와 고려 괸군이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광도에서도 같은 시기 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난장판을 좀 더 와닿게 표현하자면,
- 경상도 앞바다에 바다를 뒤덮는 대규모 왜구가 나타나 이성계와 우인열, 박위가 간신히 토벌
-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왜구의 공세가 이루어짐
- 비슷한 시기 양광도에서 왜구와 교전이 벌어짐
- 그 즈음에 전라도로 왜구가 침입해서 전라남도 순천에서 정지가 왜구를 격파
- 황해도[13] 지역에 대규모 왜구가 나타남.
- 제주도에 2백여척의 왜구가 출몰
그런데 이 시기에 혼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이성계는 이런 난국 속에서 오히려 혁혁한 공을 세우며 자신의 입지를 계속해서 키우게 된다.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대번에 격파한 이성계는 황해도 해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대활약을 했는데, 임견미(林堅味) 등이 달아나는 와중에도 화공으로 적을 물리쳤다.
무엇보다 최고의 활약은 승천부(昇天府)에 몰려든 왜구들이 대놓고 개경을 공격하려 할때 였다. 이제 말 그대로 고려의 수도가 해적때에 함락될 지경에 처해졌고, 수도에서는 비상계엄이 내려져 인심은 흉흉 그 자체였으며, 심지어 조정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피난할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이 싸움에서는 최영과 이성계가 활약하여 간신히 승리했는데, 특히 이성계는 전황이 불리할때 자신의 정예 기병을 동원하여 왜구를 아주 개발살 내버렸다. 이 시점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이미 나라를 구했다. 피난할 준비를 마친 조정에서는 처음에 패전했다. 는 소식을 들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벌어질 뻔했는데, 승전소식이 들려와 간신히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왜구의 기세가 약화된건 아니다. 이 숨가쁜 대승리가 있은 직후에 수원이 털렸고, 청주가 공격당해 관병들이 달아나는 사건도 있었다. 혹시라도 이 무렵에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게 되면, 끝도 없이 쳐들어오는 왜구와 끊임없이 이와 싸우는 최영, 이성계, 정지, 우인열, 배극렴, 박수경, 오언 등의 사투에 눈물 날지도. 게중에서도 양백연(楊伯淵) 같은 인물은 오히려 왜구보다 더 악랄해서 백성들은 "차라리 왜적을 만나는게 낫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연히 나라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1380년 해도도통사를 겸임하게 된 최영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많은데 이 직함까지 역임하긴 힘들것 같다. 그리고 수군을 꾸리려고 해도 지금 전함이 딱 백여척에 수병도 불과 3,000명 밖에 안되는데, 제대로 싸우려면 1만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창고가 비었잖아. 안될거야 아마." 라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한 우왕의 답변은 가히 가관인데, "돈이 없어서 1만명을 꾸릴 수 없다. 3천명이 병사가 한명이 백명씩 대적하라." 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진 고려무쌍
이런 형편 속에서는 왜적과 싸우는 장수들도 당연히 굉장히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왜적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정지가 순천(順天)ㆍ조양(兆陽) 등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결국 패배하자, 최영은 경복흥(慶復興), 우인열, 황상(黃裳) , 이인임(李仁任) 등을 만나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해도 도와주질 않는데 어쩌겠냐? 왜적이 이 지경인데 재상들이란 작자들은 뭐하는 짓이냐?" 고 일갈하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무슨 호환마마 인가? 한반도가 죽었음다 ㅠㅠ 이 정도면 더 이상 해적이고 뭐고가 아니라 그냥 국가 존망이 달린 싸움이다. 이 지옥같은 시간이 이어지는 도중, 드디어 반격의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하는데……
5 진포대첩
"진포대첩은 왜적을 화포를 사용해서 바다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하는, 왜구 금압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고려 정부가 수 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왜구에 대하여 총사령관 나세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사용해 큰 타격을 가함으로써 왜구의 금압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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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崔茂宣) |
이러한 최무선의 성과가 결실을 맺은것이 바로 진포대첩이지만, 진포대첩 직전에도 고려 조정에서 화약 무기를 어떻게 써보려는 시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73년 10월 공민왕은 화전(火箭)과 화통(火筒)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그 해 11월 명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병기·화약·유황·염소(焰焇) 등을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화약 만드는 노하우를 알게 되고 직접적으로 투입된 것은 우왕 시기, 진포대첩을 기점으로 해서였다.
왜구의 끝없는 침입이 계속되던 1380년 8월, 마침내 장장 500여책의 왜선은 진포(鎭浦) 어귀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진포 대첩이 벌어진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전해 지는 충청남도 서천 남쪽 즈음으로, 일반적으로는 이곳이 진포 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이해되며 국사 교과서 등에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반면에 전라북도 군산이 진포대첩의 위치였다는 소수설이 있는데, 군산시는 재빨리 이 설을 이용해서 진포대첩 기념비 등을 만들어 놓았다. 어찌되었건 금강 하류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왜선 500여척은 고려말기 한반도를 유린했던 왜구의 대부대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였다. 하필 이 시기에 이렇게 압도적인 규모의 왜구가 등장한 것은 확실히 알긴 어렵지만, 한 견해에 따르면 큐슈의 남조 세력이 다카기·아마쿠사 일대의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그리고 남조의 본거지 기쿠치 일대가 포위당한 상황 속에서 병량미를 얻기 위해 그러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그런 의견대로라면 이 1380년의 왜구는 다카기·아마쿠사 지역의 수군 세력은 물론, 규슈 최남단의 오오스미 지역의 호족 네지메씨 주변의 남조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15] 물론 앞서도 말했다시피 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워낙 견해가 상이해서 뭐라고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긴 하다. 일본쪽에서는 이 1380년의 왜구가 내륙으로 진군했다는 점에서 일본인 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고려인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정 반대의 주장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확실한것은 진포에 나타난 이 500여척의 대부대가 어마어마했다는 정도다. 이 엄청난 군단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있다가 여러 주(州)ㆍ군(郡)으로 갑자기 흩어져 마음대로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니 고려 백성들의 시체들이 산과 등에 뒤덮이는(屍蔽山野)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렇게 노략질한 곡식을 질질 끄며 운반을 하느라 땅에 널부러진 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무렵에 해도 원수였던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최무선 등은 전함 1백여척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 해 4월 경에 최영이 함선이 백여척 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3~4개월만에 극적인 증강이 이루어졌다고 보긴 힘드니 이 백여척의 함선은 당시 고려가 가진 전 해상력 이었다.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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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한반도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압도적인 규모였던 왜군은 고려군이 화약이 있는 줄을 몰랐고, 또 함선의 숫자에서도 비교가 안되는 수준에 이르자 당연히 이길줄 알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달려들었다. 이때 고려군의 화포가 불을 뿜어대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흘렀고 왜군은 거진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자들도 많았다. 이어 도주하기 시작한 왜군을 공격한 고려군은 왜군의 큰 배를 아홉 척을 빼앗았고,[17]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334명의 포로를 구출해 내었다.
그런데 전세가 절망적이 되자 왜구는 잡아놓았던 어린 아이들을 처참하게 도륙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시체가 산처럼 쌓여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 되었다. 이런 참극을 피해 겨우 3백 30여명 정도만이 도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이는데, 양 기록을 합쳐보면 왜구의 학살을 피해 간신히 도주한 사람들이 300여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포로를 잡고 있으려면 군대의 숫자도 상당해야 하는데, 겨우 피한 일부의 포로가 300여명이나 되었으니 왜구의 규모도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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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려군은 신무기 화포의 힘을 빌려 위기에 놓였던 전황을 돌파해내었으며, 압도적인 숫자의 왜선을 격파한 이 사례는 이후로도 해상에서 왜구를 격파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군사적인 의미에서 진포대첩의 승리는 정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있었다. 왜구는 전멸하지 않았다. 일부 왜구는 육지로 간신히 도망쳐 옥주(沃州)[18]로 몸을 피했으며, 여기서부터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6 사근내역 전투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육지에 상륙한 뒤,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금강 상류의 지형적 조건과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터이다. [19][20]
이렇게 한반도 깊숙히 들어선 왜구들은 내륙지방에 이미 상륙해 있던 여타 왜구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여기저기서 고려를 관광시키던 있던 병력들이 합세하여 상당한 규모였던듯 싶다. 이 병력은 충청북도의 이산(利山)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어모(禦侮) 거쳐 경상북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왜구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초토화 당했다. 중모(中牟)ㆍ화령(化寧)ㆍ공성(功城)ㆍ청리(靑利) 등을 불바다로 만든 왜구는 경상북도의 상주에 이르렀다.
당시 상주는 경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주목 지역에는 상주목, 안동부, 경산부 등 3개의 주현과 53개의 속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비교적 규모가 있던 상주 역시 왜구의 잔혹한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는데, 상주에 들어선 왜구들은 장장 6일간 머물며 상주를 잔혹하게 도륙하고 불태웠으며,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면서 완전히 제세상처럼 활보하였다.
이때, 전라도 원수 지용기(池湧奇)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라는 인물은 이 기세등등한 왜구를 직접 정탐하겠다는 요청을 했고, 고려군의 원수들은 이를 승낙하여 배검은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 상주로 찾아가는 용자짓을 했다. 배검을 본 왜구들은 즉시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배검은 "천하에 사신을 죽이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 며 되려 성화를 내었고 "우리 군의 장수들이 네놈들을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다. 근데 우리가 너희들 죽인다고 뭐가 남냐?" 며 패기로운 발언을 했다. 여기에 대해 왜구들은 "니들이 우릴 살려주려고 하면 왜 진포에서 우리를 공격했냐." 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여하간 배검은 왜구들에게 술 한잔 받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왜구들은 괴이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왜구들은 이제 겨우 나이가 2,3살인 어린 여자 아이를 하나 잡아오더니, 씻긴 이후에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오두방정을 떤 것이다. 한참 그 짓을 한 왜구들은 일이 끝나자 아이의 시체를 불태우고는, 점괘가 불리하게 나오자 "여기에 있으면 패하겠다." 싶어 다른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남하한 왜구들은 선주(善州)[21]와 현재의 성주(星州)인 경산부(京山府)를 침공했다. 이렇게 경상북도 역시 철저하게 유린한 왜구는 이제 경상남도까지 이동하여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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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한반도를 동서로 제 맘대로 활보하고 있는 왜구를 계속해서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이러한 왜구를 막기 위해 고려군은 결집하였다. 사근내역 전투를 위해 고려는 9명의 원수가 결집했는데, 배극렴은 주로 경남지역에서 왜구를 막고 있었고 김용휘, 정지, 오언, 도흥은 몇달전인 1850년 5월부터 전라도 광주, 화순 등에서 움직이며 왜구를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지용기는 몇달전에 전라도의 정읍, 명량에서 왜구를 물리친 참이었다. 배언은 명나라에 갔다가 6월 경에 귀국한 후 급히 투입되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사령관들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힘을 합쳤던 것이다.
당시 사근내역에 모인 이 고려군의 숫자는 어느정도나 되었을까? 대체로 원수 1명 당 최소 1,000여명 정도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22], 그렇게 된다면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고려군은 9,000명에서 1만을 넘는 상당한 대군이 된다. 왜구가 좀 더 잠잠해진 후에 고려가 전력을 기울여 탈탈 털어내서 시도한 2차 요동정벌당시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 3만 남짓이었다는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대군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 이들은 자신의 담당 지역에서 왜구와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전 병력을 데려오진 않았을 수 있다. 어찌되었건 9명의 원수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면 적어도 5,000명 정도는 모였을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사근내역에 주둔한 왜구와 고려군은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는…… 망했어요. 고려군은 박수경과 배언, 두 명의 원수가 참살당하고, 500여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도륙되는 엄청난 참패를 겪었다. 5,000여명 중에서 단순히 오백명이 없어졌다고만 해도 적지 않은 타격인데,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보통 대패했다고 하여 살상율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한 참패였을 것이다.[23]
여기에 모인 정지 등의 원수들이 원균같은 졸장도 아니고, 치열하게 왜구와 싸워보았던 노련한 장수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왜구가 가진 기세는 어마어마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자신들을 가로막는 관군도 사라지자 왜구는 마음놓고 함양을 초토화했다. 옥주에서부터 함양에 이르기까지 그 근방을 불태워버린 왜구에 대하여 당시의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켰으며,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졌다. 3도(道)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어 버렸다. 왜란이 있던 이후로, 여지껏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은 또 없었다. ─ 고려사절요 1380년
7 이성계가 출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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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
그런데 이렇게 군대의 사기를 올리려던것도 잠시, 이성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려군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고 만다. 이성계의 군대가 이동하는 중에도 여기저기서 도륙된 시체들이 널려있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참담한 모습을 본 이성계는 경험 많은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아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다.
이렇게 시체로 늘어진 길을 지나 이성계의 군대는 남원(南原)에 도착했는데, 왜구와 120여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던 고려군의 배극렴 등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앞선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대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을텐데 또다시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군대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은 당연한것.
그런데 이성계는 도착하자마자 "오늘은 쉬고 내일 곧바로 싸운다." 고 작전을 정하자, 여타 장수들은 "적군이 험지에 들어가서 지금 싸우면 힘듭니다. 좀 기다렸다 나오면 싸웁시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되려 화를 내며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것은 적을 보지 못하는것 밖에 없는데, 이제 적을 봤는데 싸우지 말라고? 개소리 집어쳐!" 라고 소리쳤고, 고려군은 지원군이 도착한 다음날 바로 적군과 교전하기 위하여 움직이게 된다.
8 전라도로 이동한 왜구
이성계가 이렇게 소리를 치며 움직이고 있을 무렵, 당시의 왜구는 그 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을 완벽하게 떄려눕힌 왜구들은 남하하는 대신 팔량치(八良峙)를 건너 이번에는 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주, 합포, 울주 등 왜구의 침입이 자주 있었던 경남지역에서 상당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의견대로라면 왜구는 고려군의 포위망에 토끼몰이 한 셈이 되는데, 이런 주장에서는 사근내역 전투가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기도 한다.
즉 사근내역 전투는 9명의 원수과 모여 일대 대결전을 치루고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 고려군이 왜구를 여기저기서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추격하는 도중에 왜구가 배언과 박수경의 부대를 격파하고 남원 쪽으로 도주한 전투라는 이야기. 사근내역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특별히 여타 지휘관들이 처벌 받은 정황이 없기에 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왜구는 위풍당하게 전라도로 이동한것이 아닌 경상도로 도주하지 못해 전라도로 피한 것이다.[24]
다만 여기까지 이르면 사료로는 더 확증할 수 없는 추론의 영역이기에 뭐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어찌되었건 확실한것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했으며, 경상도로 움직일 수 없어서이건 그저 전라도 역시 털어먹고 싶어서이건 왜구는 전라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후 왜구는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까지 이동했으며, 여기서 남원산성(南原山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남원산성은 왜구의 매세운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내었다. 1378년 고려 조정은 각 도에 사자를 보내 산성의 수축을 명령한 적이 있었는데,[25] 왜구의 침범이 특히 잦은 남해안 지역의 산성들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수비가 강화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찌되었건 요지에 자리잡은 남원산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쉽지 않자 왜구는 일단 물러났는데, 대신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워버리고 인월역(引月驛)에 자리를 잡았다. 인월역의 남쪽은 험준한 지리산의 기슭에 임하고 서북쪽에는 황산이, 동북쪽에는 성산이라고 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방어하기에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았다.[26][27] 그리고 왜구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28]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
북으로 올라가겠다는것은 수도권 지방을 공격하겠다는 소리다. 이 말에 수도와 지방이 모두 두려워하며 진동했다. 여기에 대해 고려군의 주력이 북쪽에 수비진을 만들면 그 사이에 왜구가 남쪽 해안가로 나가 바다로 다시 나가려는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하간 저런 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고 그저 개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는것은 왜구의 기세를 짐작케 한다.
이성계가 남원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바로 이러한 시점이었다. 고려군이 패배한다면 왜구가 전력을 보존하여 바다로 나가는것을 막을 수 없는것은 물론이고, 수도 개경마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9 양군 전력의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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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통나무배 유물 |
황산대첩에서 맞서 싸운 양군의 규모를 알기는 쉽지 않다. 이성계가 조선 왕조의 태조이며, 황산대첩의 무인으로서 이성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인만큼 과장이 들어갈 수 있다는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규모에 대한 확실한 언급이 없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황산대첩에서 군대의 숫자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패배 이후 살아남은 왜구 70여명 가량이 산으로 도주했다는 부분과, 아군의 병력이 적에 비해 10배나 열세 였다는 부분 정도다.
여기서 적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다는것은 어느정도 과장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다만, 이것이 고려군 전체보다 10배 많다는 것이 아닌 이성계의 친병(親兵)보다 10배 많다는 이야기라는 시각도 있다. 별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는 전투에 있어 여러차례 자신의 친병을 활용했고, 사서에는 몇차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계는 1361년 박의(朴儀)를 토벌하면서 1,500명의 친병을 동원했고, 1362년의 개경 수복 작전에서는 친병 2,000여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최유를 무찌르기 위해 1,000명의 병력을, 1370년에는 친병 1,600여명을 동원했다. 아무래도 이성계가 전투에 나서면서 가장 믿을 수 있는것은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친병이며, 여타 작전도 친병 위주로 움직였을 것이라는 점은 과하지 않은 상상일 터이다. 이성계의 친병이 대략 1,500여명이고 적군의 숫자가 이보다 10배라면 적은 15,000명 정도가 될 것이다.
군대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는것은 왜구나 고려군이나 어느정도가 충원되고 어느정도가 사라졌는지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진포대첩에서 처음 왜구가 나타났을 시기의 병력은 당시 왜선이 500여척이라는 점에서 어느정도 짐작을 할 수 있다. 1992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수중 갯벌에서 발굴된 소위 '진도 통나무배' 유물은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4세기 무렵의 왜선으로 짐작되는데,
"中 고선박 추정 '진도 통나무배' 왜선인 듯" 대략 30 ~ 40여명 정도를 실을 수 있는 규모다. 당시 왜선이 30여명에 탔을 경우 승선 인원은 총 1만 5천여명에 이르며, 최대로 보면 2만 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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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중에 진포대첩에서 사망하거나 전투불능이 된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알 방법 같은건 전혀 없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거의 다 죽였다(殆盡)는 식으로 언급이 되고 있긴 하나 대략적인 숫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이 왜구가 내륙으로 이동한 뒤 여타 세력과 합쳐지게 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추정도 어렵다.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가 몇 명인지, 여기에 다히 합류한 왜구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 황산대첩을 연구한 이상훈은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에서 고려군의 숫자는 2만 가까이는 되고 왜구는 1만명 이하일 것이라 추정하기도 했는데, 이상훈의 연구에서도 고려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주장에 근거가 있지만 왜구의 규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제시가 없는 편이다.
다만 황산대첩 이후 고려군이 1,600여 필이나 되는 말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죽은 전마를 제회하고 노획한게 이 정도라면 실제 전투에서는 최대 2,000여 정도는 되는 기병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왜구의 규모를 가볍게 생각 할 수 없다. 유사 이래 대부분의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보다 숫자가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군의 비율이 1:2만 되어도 왜구는 4,800여명이 넘고, 1:4 정도에 이르면 만 단위를 육박한다.
무엇보다 왜구는 사근내역 전투에서 5,000여명 ~ 1만에 이르는 아홉명의 원수가 이끈 고려군을 대파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사근내역 전투가 일대 결전이 아닌 왜구가 일부 포위망을 돌파하는 전투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전이었다는 일반적인 의견에 따를 시에 저 정도 대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왜구의 숫자는 상당했을 수 밖에 없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보았을때 왜구의 숫자는 간격이 좀 크긴 하지만 최소 5,000여명에서 최대 2만 가까이, 그 중간치를 보자면 1만명 남짓이나 1만 5천여 남짓 정도가 될 수 있다. 가장 적은 추정치인 오천여명도 보통 해적때의 숫자는 아니다. 후대에 확실한 국가간의 대결인 임진왜란에서 중요 전투인 이치 전투등도 이 보다는 적은 규모다. 최대치로 추정하면 말할 것도 없다.
다음으로는 고려군의 규모인데, 원수들의 숫자가 거론되기 때문에 왜구들보다는 숫자에서 고려해볼만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여기도 명확하진 않다. 최영에게 우왕이 "일 대 백으로 싸우셈." 이라는 드립을 날린게 바로 이 해 였으니 고려로서도 썩 대군을 동원하기 쉬운 여건은 아니었고, 상황이 호전된 시점에서 요동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때도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이 최대였으며, 이 조차도 전투병력만 따지자면 3만명 남짓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1380년의 전선에서 고려가 일대 회전 한방에 내놓을 수 있는 병력은 무슨 수를 써도 2만명 가량 이상은 힘들 었을 것이 자명하다.
이성계의 군대는 8명의 원수들이 참여했다. 원수가 대략 1천여명을 지휘한다고 보면 이성계의 지원군은 8,000명 ~ 1만명 정도가 될 수 있다. 다만 사근내역 전투에는 전라도나 경상도에 있던 원수들 뿐만 아니라, 전투 직전에 귀국한 배언 들도 급하게 투입되었는데 그렇다면 당시에 고려 중앙의 병력이 투입되었을테니, 재차 원수를 보낸다고 해도 그만한 군대가 주어졌을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진포대첩이 벌어지는 무렵에 급하게 양광도와 서해도에서 병력을 징발하는 언급이 있는데, 당시 조정에서도 부랴부랴 군사를 급하게 끌어모으던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다. 이럴 경우에는 이후 파견되는 이성계의 군대가 급하게 끌어모아 숫자나 수준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이 이성계의 군대는 사근내역 전투에서 패배한 고려군과 합류했다.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숫자도 애매모호하기에 양군이 합쳐져서 얼마나 될지는 알기 힘들다. 또한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했는데, 전사한 오백여명 외에 탈주한 병사들이 있다면[29] 어느정도나 수습했을지도 알기 어렵다.
여하간 최대로 잡으면 고려군은 이 당시 2만명은 되었을 것이며, 최소로 잡는다면 만여명 안팎을 간신히 오고갔을 터이다. 여담으로 황산대첩 관련 행사를 하는 남원시에서는 당시 고려군이 무찌른 왜군의 숫자가 20만 명 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주장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남원서 황산대첩 재연 행사"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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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대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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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지원군으로 도착한 다음날 아침 바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이성계는 높이 477미터의 여원치(女院峙) 고개를 넘어 운봉(雲峰)에 이르렀고, 운봉 분지를 지나 황산 서북쪽에 도달하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이 시점에서 이성계와 일본군의 거리는 수십 리 정도의 거리였다.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적진을 살피고 계획을 세운 이성계는 그렇게 말하며 정산봉 오른쪽의 작은 길로는 자신이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대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나아가게 했다. "후면을 공격할 것이다." 는 이성계의 언급을 보았을때, 이는 고려군이 평탄한 길로 나아갔을때 왜구가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하려고 하는 점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정산봉은 황산의 한 줄기로 황산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나아간 정산봉 오른쪽의 길은 고려군을 기준으로 볼 때 황산의 동쪽 자락에서 동북으로 난 길로 추정되며, 평탄한 길은 정산봉 오른쪽의 동무와 서무로 이어지는 길로 추정된다.
동무와 서무 방향으로 나아간 고려군의 여타 병력은 조금 전진을 하다가 강력한 적군의 기세를 보고는 무리하지 않고 우선 물러났다. 그 무렵, 왜구들은 반대편의 길을 통해 재빠른 기병 등을 동원해 고려군의 뒤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이는 이성계의 예측대로였기 때문에, 왜구의 기병들은 고려군의 뒤를 치지 못하고 그 길로 오고 있던 이성계와 교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군의 병력이 둘로 나뉘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친병을 다른 장수에게 맡길리가 없으니 이 당시 왜구 기병과 교전했던 고려군은 이성계의 친병 위주로 생각된다. 이성계가 여진족 사이에 영향력이 막대하였다는것은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 여진 기병을 동원했던 사례도 확인이 되는 만큼[30] 이 싸움은 여진 기병 VS 왜구 기병 이라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활을 잡고 대우전(大羽箭)과 유엽전(柳葉箭) 수십 발을 쏘아대며 왜구를 죽였다. 이렇게 벌어진 난전은 3차례를 이어졌는데, 나중에 이르러서는 진흙탕에서 교전을 벌였다. 좁은 오솔길에는 크게 교전을 벌일만한 뻘판은 없으므로, 이 싸움은 3번을 싸우면서 이성계가 적을 점점 평탄지로 유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평탄한 길로 나서다가 회군한 고려군이 합세하여 같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고려군의 뒤를 치려던 왜구를 오히려 고려군이 협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뻘판에서 난전을 벌이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다가 어느정도 적을 물리치고 뻘에서 나와보니, 대부분의 사상자는 왜구들이었고 고려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앞서 평탄한 길로 가던 고려군이 회군하던 무렵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보면 이 싸움은 저녁에까지 치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등에서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소탕해버렸다." 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정황을 보면 이는 실제하고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1] 이후에 이성계가 하늘의 해를 가리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진 해를 가리킬 순 없으니 전투가 이틀에 걸쳐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관련 기록에서는 특별히 날짜의 변경을 가리키는 기록은 없으니 저 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날짜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날에 벌어진 싸움에서 고려군은 왜구의 기병을 되려 역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왜구는 험준한 위치를 살려 굳게 버티고만 있으면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왜구는 고려군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참 공격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당시 왜구를 이끌던 대장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는 자였다. 아기발도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굉장히 용맹해서 여타 왜구들이 두목으로 모시며 데려온 것. 아기발도는 이성계의 포진을 보자 "저 작자가 보통 놈이 아니니 주의해야 하겠다." 고 말했다.[32] 이성계가 거느리고 있던 친병들은 보통 전투력이 아니었을테니 여타 고려군과 다른 면모가 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자 이성계는 일단 요해지에 군대를 배치한 후, 적을 끌어내기 위해 휘하의 이대중(李大中) 및 10여명을 시켜 싸움을 걸었다.[33] 그렇지만 이후 기록에서 적이 계속 위에서 내려치는 포지션에 있는것으로 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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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李之蘭)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직접 적을 보며 군대를 동원해 아래서부터 쳐올리게 했지만, 왜구들도 자신들이 현재의 지리적 이점을 잃어버리면 꼼짝없이 죽는것을 알고 있었을테니,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왜구도 죽을 힘을 다해(死力) 버티며 위에서 공격을 퍼부어대니 고려군도 당해날 방법이 없었던것. 이렇게 되자 고려군은 교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여타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꽤나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던 모양.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 본 이성계는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했다. 나팔을 불어 군대를 정돈시킨 이성계는 다시 한번 적진과 부딫혔다. 고려군은 마치 개미가 절벽에 붙어 가듯 어렵게 어렵게 공격을 했는데, 이성계 역시 직접 나섰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험지에서 난전이 벌어지던 중에, 왜구의 장수 한명이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다가가고 있자 이지란(李之蘭)은 깜짝 놀라 이성계에게 소리쳤다.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34]
그러나 한참 난전 중인 이성계는 전장의 소음 때문에 이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자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쏘아 그 장수를 죽였다.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도 알지 못했을 정도니 당시의 이성계는 정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자 이성계는 급하게 다른 말을 탔으나, 바꿘 탄 말도 또 화살에 맞아 쓰러져 또다시 말을 거푸 바꿔야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이성계 본인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적의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고 만다. 관련 전투 기록에서 본인의 무용 + 창업자 버프로 절대무적으로 나오는 이성계가 적에게 당하는 몇 안되는 기록 중 하나.
하지만 이성계는 억지로 화살을 뽑아내고 참고 일부러 더 열심히 싸워서, 여타 병사들은 이성계가 부상당한 줄을 몰라 사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간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그런 난전 중에 섞여들어가 죽어라 싸우다보니 이성계도 적에게 포위되곤 했지만, 그럴때마다 주변의 기병들과 힘을 합쳐 돌격을 해서 충격력을 사용해 포위에서 돌파하곤 했다. 게다가 워낙 괴물같이 싸워 적을 죽여대자 적도 주춤해서 이성계에게 잘 달려들지를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싸우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자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고 주위에게 소리쳤다.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장수가 저러는데 옆에서 "예, 저는 겁나니 도망가겠습니다."(……) 할 사람은 없을테니, 같이 싸우는 고려군도 힘을 내면서 싸웠다고 한다.[35] 그런데 고려군이 이성계의 분투로 힘을 낼떄, 왜구의 기세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성계처럼 적의 대장 아기발도가 여기저기서 날뛰며 흰 말을 타고 돌격하자 기병의 충격력에 여타 고려군은 계속 당했고, 이게 반복되다보니 고려군은 아기발도가 보이기만 해도 물러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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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발도(阿其拔都) |
그 아기발도가 하도 잘 싸우자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해서 이지란에게 사로 잡을 수 없겠느냐는 말을 했다. 사실 이성계는 일전에도 적이었던처명(處明)[36] 등을 항복시켜 부하로 만든 경험이 있어서 그런 목적에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전투도 워낙 치열한 난전이었고 기마에 탄 아기발도가 마음대로 휩쓸고 있는 지경이라 그런 짓을 할 틈이 없었다. 이지란은 "그러려면 사람이 많이 상할 겁니다." 라면서 어렵겠다는 말을 했고, 이성계는 아기발도를 어떻게 할 생각을 포기하고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말에 타서 마음껏 날뛰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아기발도는 중갑옷을 차려 입고 있어서 활을 쏘아 맞추기 어려웠다.[37] 그러자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내가 저 녀석 투구 꼭지를 쏠 테니까, 니가 마무리 해라." 라고 말하고 그대로 아기발도의 투구꼭지를 쏘아 맞췄다. 투구 끈이 끊어진 아기발도가 다시 투구를 고쳐 쓰려고 할때 이성계는 화살을 쏘며 적을 방해하면서 주의를 끌었고 노리고 있던 이지란은 화살을 쏘아 저격에 성공, 아기발도를 죽여 버렸다.
무협지 같은 일이 벌어지자 왜구의 사기도 크게 꺾였다. 난전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투의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가버렸고, 이성계가 직접 휘저어대자 대장을 잃은 적은 변변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정예군을 속절없이 잃었으며, 여기까지 이르자 전세는 결정나서 왜구는 아비규환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적이 붕괴하는 통에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완전히 사기가 올라 진격, 또 진격했다. 사면에서 공격했다는 언급이 있는것으로 보아 대다수 왜구들은 도주에 실패하고 포위되어 살육 당한 듯.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를 완전히 포위 - 섬멸하였다. 백여명도 못 되는 병력만이 간신히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이성계는 그 남은 왜구에 대해서는 "어차피 적의 정예군은 다 섬멸했다." 며 추격하진 않았다. 워낙 대살육이 벌어진 통에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11 영웅의 귀환
없애버린 적의 숫자도 대단하고 전리품도 굉장히 얻은 대승이라, 여러번 승리를 거둔 이성계도 내심 자기가 기특했는지(?) "적군을 물리치려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자화자찬 하기도 했다.[38] 그래도 이런 대승을 거둔 마당에 누가 나무라기도 하겠는가. 모두 군악을 울리며 승리의 즐거움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민가에 피해는 입히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군단을 이끌고 개경으로 귀환했다. 이때 조정에서도 승리 소식을 듣고 요시 그란도시즌을 외치는 분위기가 되어 판삼사(判三司)였던 최영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백관을 이끌고 나와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이성계를 맞이했다. 말을 타고 오던 이성계는 최영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에게 절을 했고, 이성계의 절을 받은 최영도 맞절을 하더니 감격에 겨워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했겠소이까?"
최영의 모습을 본 이성계는 황급이 고개를 숙이며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감정이 북받힌 최영은 이제 거의 오열하면서 소리쳤다.
12 결과와 영향
"왜인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했고 우리는 보전에 약했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이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 정약용, 《다산시문집》제14권 발황산대첩비(跋荒山大捷碑)
황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진포해전과 같이 연결시켜서 보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 왜구에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가, 더 나아가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왜구와의 싸움은 상륙한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하고 있으면, 현지의 병력이 힘겹게 싸우다가 뒤늦게 도착한 군대가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포대첩을 기점으로 드디어 고려는 해상에서 왜구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역으로 대마도를 공격하는 정도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물론이고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국가는 일본의 육상병력에 해를 입더라도 해상에서는 적을 압도하였다.[40] 그 이전까지 해전에서는 어차피 발리니까 수군 키울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대놓고 나오던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일대 반격의 시점이 하필 왜구의 가장 거대한 공세가 이루어진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극적이다. 진포대첩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승리였지만 육지에 상륙한 병력은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가 왜구에 유린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또다른 대패를 당한다면 진포대첩이 무색하게 대규모의 왜구가 무사히 살아나가 또다시 한반도를 유린하거나, 더 최악의 가정으로는 한반도 남부에 완전히 자리 잡아 장기간에 걸쳐 백성들에게 재앙을 안겨다 주고 북상하거나 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산대첩은 지금까지의 왜구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괴멸시킴으로써 당장의 군사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큰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거의 국가영웅을 대하듯 하는 이성계의 귀환 축하는 장장 30여년간 왜구에 유린되어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정도 보여준다.
진포전투 - 황산대첩은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을 가점왔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관음포전투가 벌어지고 나는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긴 했지만, 500척을 동원했을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지속적으로 약해지던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도 진포전투 - 황산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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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1년(1372) 이후 水軍체계의 재검토 中 ─ 이강욱, 군사지 제 82호 |
가장 큰 변화는 왜구의 침입 루트의 변화다. 진포해전과 황산대첩 이전까지 한반도 전 지역을 들쑤시고, 특히 수도와 가까운 강화도 부근에서 어정거리며 개경을 수도 없이 위협했으며 서남해와 서해의 세미를 완전히 털어먹던 왜구는 사라지고, 대신 동해안을 비적거리는 정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30여년간 고려의 조창 및 조운선이 완전히 왜구에게 털렸던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변화. 왜구는 이제 직접적으로 서해안의 조운선 루트를 털어먹는 일에 애로사항을 느끼게 되고, 상륙해서 깊숙하게 진군하면서 어떻게든 내륙으로 들어가 식량을 얻으려고 하는 정도로 바뀌었으며, 이 역시 잇달은 대승으로 자신감과 경험을 얻은 고려 조정 등에서 대책을 마련해가며 점점 근절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자신감은 드디어 박위의 대마도 원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고려의 군사 - 정치적 호전을 제껴두고 보자면, '이성계' 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위신에 대해서도 생각 해 볼만하다. 이성계는 별도의 세력을 가진 역전의 무장이었지만, 이제 황산대첩의 승리로 중앙 정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영웅이 되었다. 흔들리는 나라, 전쟁 영웅, 그리고 별도로 가진 강력한 세력. 이렇게 되면 판이 짜여졌다고 할만 할텐데,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런 힘을 더해줄 '지식인' 의 존재밖에 없었다.
그런 이성계가 황산대첩의 승리로 그야말로 국가적 영웅이 되고 난 후 몇년 뒤, 동북면에서 외적을 물리치려고 하고 있을때, 왠 사내가 이성계를 찾아오게 되는데……
13 황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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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 탁본 |
굉장한 대승, 그것도 조선 왕조의 창업자가 거둔 승리였으니 당연히 이를 기념하는 물건들도 만들어졌다. 오히려 좀 의외로 늦었다고 할만한 선조 시절 1577년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청으로 전라북도 남원에 황산대첩비가 만들어졌다. 이 황산대첩비는 수백년을 지나도 별일 없이 무탈하게 있었는데, 광복이 눈 앞이던 1945년 1월에 일제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여타 이야기에서는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 차원에서 남원경찰이 소방대를 이용해 부셔버렸다는 말이 전해지는데……그런데 관련된 증언 하나는 좀 다르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는 향토사학자 이만기(李萬器) 씨의 말에 따르면, 1945년 1월 16일 밤에 술에 꽐라가 된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와서는 술김에 폭파시켜 버리고 총질까지 했다. 고 한다. 뭐 이런 경우가 [41] 여하간 완전히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다가 나중에 복원하였다.
- [1] 엄밀히 말하자면 왜구의 침공 숫자 자체는 이후에도 꽤 있었다. 다만 황산대첩과 관음포대첩 이후에는 황산대첩 당시와 같은 충격과 공포 수준의 포스는 거의 보여지지 않게 된다.
- [2] 그래도 준동하는 세력들은 1383년 5월 정지(鄭地)가 이끈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 [3] 이 전기왜구는 이후 나타나는 16세기의 후기왜구에 비해서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관심이나 연구 성과가 적은 편이다. 사료가 후기왜구사에 비해 좀 부족한 탓도 있고.
- [4] 당시 김휘남의 함선은 25척, 상대인 왜선은 20여척이었다.
- [5]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도 왜구가 해주(海州)에 침입하여 해주 목사의 아내와 딸을 납치해가거나, 고려 수군의 배를 불태우는 일 등이 버젓이 발생하고 있었다.
평화가 다 죽었구나 - [6] 『고려사절요』 권28, 공민왕 13년 3월
- [7] 『고려사절요』 권28 공민왕 18년 8월
- [8] 어디까지나 좀 더 여건이 좋아 할 뿐이지 그런건 고려도 힘들었다.
- [9] 사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후대의 신립 등도 하긴 했다.
- [10]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년 2월 5일
- [11] 홍산대첩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왜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이영 교수는 "소규모의 병력을 대상으로 했고 전과도 불분명하다. 홍산전투가 장렬하게 기록된 것은 '심리적인 반격' 의 부분이 더 크다." 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규모가 커서 대승이 아니라, 발리기만 하다가 제대로 한방 먹여준것이 홍산전투이기에 특별하게 기록되었다는 것.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
- [12] 울산 부근부터 출발해서 이렇게까지 내륙으로 들어온 곳이다.
- [13] 당시에는 서해도라고 불렀다.
- [14] 일반론적인 시각은 보통 그렇고, 다만 당시의 사건 해결에 화포가 그리 큰 역할을 끼치지 않았다는 식의 의견도 제시되고는 있다.
- [15] 고려 말 왜구와 남조 : 경신년(1380)의 왜구를 중심으로 中, 이영
- [16] 조선왕조실록 최무선 졸기
- [17]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년 4월 14일 5번째기사
- [18] 충북 옥천
- [19]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 이영
- [20] 이에 대한 일본에서의 일부 시각은 "왜구가 내륙으로 익숙하게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체가 고려인들이어서 아닌가?" 하는 식의 시선이 있다. 금강을 따라 이동하는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박의 차원에서 나온 연구의 주장이다.
- [21] 경상북도 선산군이었다. 1995년 구미시에 통합되었다.
- [22]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23] 다만 사근내역 전투에 대한 전혀 새로운 주장도 있다. 아래 항목 참조
- [24]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25] 『고려사절요』 권31, 우왕 6년 7월조
- [26]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 이영
- [27] 실제 이성계에게 여러 장수들이 "왜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곳에 들어섰다." 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 [28] 담양이다.
- [29] 전근대 이전의 병력 피해는 전사보다는 오히려 이런 경우가 많았다.
- [30]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76번째기사
- [31] 황산대첩비 자체가 후대에 세워진 일이니 고증은 좀 맞지 않을 수 있다. 전투를 정확히 기록하기보다는 태조의 업적을 찬양하는것이 주 목적이기도 하고.
- [32] 나중에 고려군에게 잡힌 포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 [33] 고려사절요에는 이대중 및 10명 정도로 언급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된다. 이대중 외에 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
- [34] 기록에서는 令公視後 라는 말을 연달아 두 번을 하는 것으로 쓰여져 있는데, 당시의 급박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 [35] 이성계의 주변에서 같이 싸울 정도면 이성계의 친병이었을테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 [36] 이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따라 죽어라 싸웠다. 이성계의 말 앞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이렇게 이성계의 친병들이 이성계를 호위하며 싸우니 괴물같은 이성계의 무용도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면도 있다.
- [37] 당시 왜구가 훈도시 하나 걸치고 있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무장 집단이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 [38] 조선 태조 이미지와 말년에 이방원에게 당한 서러한 늙은이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무인으로서 지낼때의 이성계를 보면 자기 활 실력을 자랑하며 웃어제끼거나 지지부진한 다른 장수들보고 "왜 이리 못 싸워?" 하다가 곤경에 처해지기도 하는등 굉장히 활달한 성격이다.
- [39] 최영과 이성계의 사이는 상당히 돈독했다. 특히 최영은 이성계를 꽤 아꼈는데, 이성계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따졌을 정도.
- [40] 이순신이 대단하긴 하지만, 사실 원균처럼 말아먹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_-
- [41] 동아일보 1976.10.28 기사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신불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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