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송제 인사드립니다.
지난주 조선왕실의 왕릉군(王陵群)이 집결된 서삼릉(西三陵)과 사탑말산 여석령에 이어 이번 역사탐방 산행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역사의 숨결과 맞닿아 있는 곳, 한강을 둘러 싼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렸던 아차산(娥嵯山)과 용마가 태어나기를 바라고자 용마산 그리고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이 묻혀 있는 역사의 교육장인 망우산을 계획 하였습니다. 호젓하게 역사가 숨쉬고 있는 읽어버린 역사를 찾아 여유로운 산행도 하면서 역사 공부와 그 유적지 탐방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아차산(峨嵯山 287m)
구리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두가지 표기가 나타납니다. 지금의 '아차(峨嵯)'와 음과 뜻이 똑같은 명칭은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 처음 나타납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이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아차산은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며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과 유사한 명칭은 『경기지(京畿誌)』양주조에 화양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설명한 데서 나타납니다. 이 악계산은 아차산과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아차산 서쪽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차'와 '아단'의 뜻은 일반적으로 '작은' 또는 '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아차산은 해발 287m로 평평한 능선을 따라 걸으면 등산과 산책의 중간쯤 되는 난이도를 가집니다. 고구려 군사 주둔지였던 보루가 복원되어 있고, 코스 시작 부분 고구려 역사문화홍보관과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동상 등도 있어 고구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을이면 아차산 능선에서 보이는 한강 둔치의 코스모스 물결이 장관입니다. 또한 산은 낮아도 주변 일대가 평지라 정상에서 보이는 한강과 어우러진 도심의 야경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 아차산의 유래
(제1설)
한양성은 풍수지리 형세상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남쪽의 남산 (목멱산)이 각각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가 형성되기 전에 어떤 산이 한양성의 안산(案山)이요, 동서남북의 남쪽 주작을 이루는 산이 되려고 한양을 향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는 도중에 지금의 아차산 자리에 이르러 한양 쪽을 보니 이미 그 자리에 종남산이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산이 그 자리에 퍼져 "아차" 했다 하는 것에서 아차산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제2설)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어떤 우국지사가 의병을 모집해서 서울을 지키려고 쫓아 들어왔는데 막 아차울 고개를 올라서서 보니 이미 서울은 함락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우국지사는 "아차 늦었구나!"라고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하는 데에 아차라는 유래가 나왔습니다.
(제3설)
옛날에 삼청동에 점을 잘 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네가 점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라." 해놓고는 통 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 놓고서 "이 안에 있는 쥐가 몇 마리냐?"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린데 세 마리가 들었다고 하니 이 놈을 죽여버려라."라고 임금이 말했습니다. 여러 장정이 달려들어서 그 점쟁이를 붙잡아 나간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두 마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을 급히 보내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죽이지 말라고 달려가면서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을본 백정이 빨리 죽이라는 줄 알고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차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 자료원 : 구리시청 인용
아차산: 광진구청 소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얽힌 아차산! 한강과 함께 오랜 숨결로 광진의 대지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광진과 함께 살아온산이 바로 아차산입니다. 아차산은 광진의 푸르름을 더욱 맑은 빛으로 우리의 삶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강호의 이상향으로서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가져 여기에 쌍수정(雙樹亭)을 세워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농로.어옹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심(詩心)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곳입니다. 또한 불도를 닦기 위한 도량(道場)으로 은석사(銀石寺), 범굴사(梵窟寺), 영화사(永華寺)가 있었으며 강나루 쪽으로는 백중사(伯仲寺)가 있었습니다. 아차산 자락인 용당산에는 양진사(楊津祠)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 뱃길과 어촌의 안녕을 빌기도 하였습니다.
※ 자료원 : 광진구청







용마산(龍馬山 348m)
우리 고장의 가장 높은 산인 해발 348m의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면목동 동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우리공원, 중곡동 간의 산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 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집니다.
※ 자료원 : 중랑구청
용마산은 용마폭포공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인공 폭포라는 유명세가 용마산의 명성을 더했습니다. 용마폭포공원은 용마산의 채석장을 활용해 조성했고, 산중턱에서 뭉툭하게 잘려나간 바위산이 흉물처럼 버려져 있다 폭포로 변신한 것입니다. 지금은 용마산의 기세가 거대한 폭포수를 병풍처럼 아우르며 조화를 이룹니다. 그로 인해 용마산의 산세에 다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폭포는 용마(龍馬)라는 이름과도 잘 어울립니다. 용마산 중턱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마치 용마의 포효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과 관련한 기원은 따로 있습니다. 용마산의 어원은 삼국시대로 올라갑니다. 용마산은 아차산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에 해당했습니다. 당시 인근 마을에 장수가 될 재목의 비범한 아기 장수가 태어났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역적이 될 아이'라고 수근거렸고 부모는 자신들의 죽음이 두려워 아이를 죽여 뒷산에 버렸습니다. 그 후 뒷산에서 용마가 나와 날아갔다고 해 용마산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같은 산 아래 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산 이름을 용마산이라고 붙였다고도 합니다. 지금은 힘찬 물줄기가 용마의 형상을 대신할 따름입니다.
※ 자료원 : 서울시
망우산(忘憂山 281.7m)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망우산은 해발 281.7m이며 망우산 일대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습니다. 이곳이 공동묘지로 지정된 것을 1933년 5월 27일 경기도의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공동묘지로 사용하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사실 망우산은 잘모르나 망우리공동묘지는 누구나 알고 있어 꺼림칙 하였지만 실제 가보니 공원으로 조성되고 산책로에는 많은 주민들이 산책,운동을 하고 있어 공동묘지라는 분위기와는 딴 판으로 조용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수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로 총면적 490,884평에 약 28,500기의 분묘가 있으며 1973년 3월 25일 봉분이 가득차 더 이상 묘지 쓰는 것이 금지된 이후 현재는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2005년 9월말 현재 17,041 기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들 전망입니다. 망우리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오세창, 한용운, 천연두 보급의 건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서기를 역임한 문명원,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소가 있으며, 이들 일곱분의 유명인사 연보비가 공원내 산책로 조성과 함께 지난 97년 2월에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98년 2월에 시인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옹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 분의 변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김정규,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김말봉, 김이석,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 언론인 설의식, 정치인 이병홍, 가수 차중락, 친한 일본인 아사가와 다쿠미, 조선시대 순조의 첫째 딸인 명온공주 등이 안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또한 망우동 산 57-1번지 일대 망우리공원 내의 순환도로 5.2km를 아스콘포장하여 산책로를 만들었으며 산책로의 이름을 공모하여 98년 5월‘사색의 길’로 정하고, 도시환경과 자연관찰로, 종합안내판, 나무정자, 약수터 등이 새로이 설치되어 구민의 휴식 및 자연공원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습니다.
※ 자료원 : 중랑구청